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문단 편집) === 반구대 이름의 유래 === 반구대 암각화의 반구대가 거북이가 앉은 모습을 한 바위에서 명칭이 유래하였다는 설명을 듣고 흔히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의 이름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아니라 암각화가 위치한 대곡리 인근의 유명 문화재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원래 '반구대(盤龜臺)'는 [[비경]]으로 [[신라]] 때부터 알려졌던 곳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정몽주]], [[정선(화가)|정선]] 등 많은 역사적 인물이 여기서 [[시]]를 남기거나 [[겸재 정선]]이 공회첩에 [[산수화]]를 남기기도 하는 등 암각화로 알려지기 전에도 경치가 좋다고 소문난 지역 명소였다. 바위의 위치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돌아나오면서 보이는 반구서원의 강 맞은편에 있다. 해당 위치는 반구천[* 대곡천의 옛 이름]이 한바퀴 휘돌아 나가는 곳의 바위 이름이며 현재에는 그 위에 '반구대정자'가 건립되어 있다. 후술한대로 [[원효]]가 세운 반고사 터로 비정되고 불상도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문제는 대체 반구대가 언제부터 반구대라 불리웠는지에 대해서는 알기가 어렵다는 점인데, 우선 같은 울산광역시의 [[중구(울산광역시)|중구]]에는 [[반구동]]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반구대와는 직선거리로만 15 km정도 차이나며 해당 행정구역의 이름은 한자부터 반구(伴鷗)로 다르고 그 이름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세운 반구정(伴鷗亭)에서 유래한 것으로 반구대(盤龜臺)와는 별 관련이 없다. 앞서 말한 '''반구서원'''의 다른 이름은 포은대인데, [[정몽주]]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하여 그의 호를 딴 것이다. 다만 [[여말선초]] 사람인 정몽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며, 조선 후기인 [[1712년]]([[숙종(조선)|숙종]] 38)에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를 기리기 위해 언양지역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것이다. 또한 현재의 위치 또한 원래 건립 위치가 아닌데, 1712년에 지어진 본래 반구서원은 강 건너편인 반구대 자리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1년]]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 포은대영묘비, 포은대중수비, 반구서원유허비가 [[1905년]]까지 세워지다가 [[1965년]] 사연댐 건설과 함께 수몰됨에 따라 현재 위치로 이전된 것이다. 포은대 이외에 반구서원(盤龜書院)의 또다른 이름은 반계서원(盤溪書院) 인데, 이는 반계 [[유형원]]과는 관련이 없고, 그냥 반구대의 반과 개울을 뜻하는 계 자를 합한 것으로 보이므로 사실상 '반구 계곡'이라는 뜻에 불과하다. 또 반구서원의 원래 이름은 반고서원(盤皐書院)인데 이는 한강 정구가 [[1673년]]의 자신의 서간에서 반구대에 들러 이곳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내용이 있는데, 1712년 반구서원의 창건 당시의 유학자들이 그의 서간 내용의 반고(盤皐)를 따와 이름지었다고 한다. 다만 [[http://m.gjnews.com/view.php?idx=56427|해당 기사]]에 의하면 정작 정구가 썼다는 실제 서간 내용에는 '언양 인근에 잠시 들렀을 때 반고(盤皐)의 형승(形勝)을 보고 싶으나 길을 몰라서 가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그가 실제로 반구대에 들렀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이 반고(盤皐)가 반구대를 뜻하는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냥 [[18세기]]초 언양 유림들이 끼워맞춘(...)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반고(盤皐)에 거북 구([[龜]])자가 없지만 언양 일대에 반구 또는 반고라는 이름의 명승지가 반구대 이외에는 없는 것을 생각하면 반구대라고 비정한 것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반구동에 위치한 반구정은 한자가 伴鷗亭으로 [[갈매기]]와 벗하는 정자라는 뜻이 되어 완전 다르다.] 또한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에도 盤龜라고 하여 반구대를 그린 그림이 남아있으나, 정선의 노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므로 사실상 반구서원의 건립시기와 비슷하거나 그 후대이다. 한자는 서로 다르더라도 반구, 또는 발음 비슷한 이름이 기록에서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원형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사(磻高寺)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중대의 고승 [[원효]]대사가 이곳에 머무르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이 반고사가 위치한 곳이 바로 현재의 반구대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참고로 [[1970년대]]에 이 반고사를 찾기 위해서 [[동국대학교]] 교수들이 대곡천 인근을 뒤지다가 [[울주 천전리 각석]]과 그 재조사 과정에서 [[반구대 암각화]]까지 발견한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조사의 목적인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3104|절터 발굴 과정]]에서 천전리 각석의 맞은편에 무너진 탑이나 파편 등 [[통일신라시대]]의 절터가 발굴되었는데 이곳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 작아서 그냥 천전리사지라고 명명되었고, 지금의 복원된 위치가 아닌 과거의 반구서원 자리 즉 반구대에서 [[불상]] 등이 발굴되어 기존에 반구사지라고만 부르던 곳을 반고사터로 비정하였다.[* 발굴된 불상은 [[부산대학교]] 박물관 뒤편에 있으며 반고사 석조여래좌상이라 한다. 참고로 [[http://museum.ulsan.ac.kr/boardCnts/view.do?boardID=1922&boardSeq=47425&lev=0|울산대학교 박물관]] 등에서 해당 불상의 원래 위치를 울주군 천전리 탑등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어서 일부 [[https://blog.naver.com/twj4689/222194492438|블로그]] 등에서도 천전리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천전리사지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불상이 발굴된 반고사지는 천전리가 아닌 대곡리이다. [[http://www.uj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2053|울산매일신문]]에서 위치까지 정확히 비정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이름이 비슷하다고 비정한 것만은 아니고, 삼국유사[* 피은(避隱) 제8(第八),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조 [[https://m.blog.daum.net/woojangx/375?category=1636782|전문]]]를 보면 [[삽량주]] 아곡현 영취산에 낭지스님이 살고, 원효스님이 그 서북쪽의 반고사에 머물면서 낭지스님을 찾아뵈었다고 나와 있다. 이 영취산(靈鷲山)은 영축산이라고도 읽는다.[* 한편 그 연유에 대하여 [[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C%B6%95%EC%82%B0|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대 인도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영축산의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는데, 현대 한국에서는 영축, 영취, 축서, 취서 등으로 혼용된다. 일반적으로는 독수리 취로 읽으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읽는다. 취 또는 축의 원래 발음이 '축'이었다는 것은 [[1463년]]([[세조(조선)|세조]] 9) 간행된 '법화경언해본'에서 밝히기를 불교에서 유래된 '축(鷲)' 자를 취(就)자와 조(鳥)자의 합자로 된 '취(鷲)'자와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영축산,영취산,취서산 등 정확히 불교 유래의 여러 이름들이 혼용되어 왔던 산이 바로 언양 인근에 2곳이 있다. 한 곳은 [[통도사]][*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므로 원효대사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건립된 셈이다.] 의 인근에 위치한 현재의 영축산(1082.2m)[* 취서산이라고도 한다.]이고, 하나는 현재의 문수구장 서쪽에 위치한 영취산(352.1m)[* 영축산이라고도 한다.]이다. 다만 방향이 완전 다른데, 천미터 영축산은 언양의 서남쪽에 있고, 반구대는 그 동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곳이 낭지스님이 살던 자리라면 그 서북쪽은 간월산이나 가지산, 신불산 등이 되지만 반구대와는 영 멀다. 그러나 300미터 영취산은 현재의 굴화 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 동북쪽은 반구대가 된다. 게다가 천미터 영축산이 현재의 양산 즉 삽량주에 있는 것은 맞지만, 삽량주 아곡현은 구불, 굴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이 현재의 굴화의 옛이름 굴아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또 영취산 아래 율리에서 영축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절터도 발굴되어 영축사지라 하면서, 따라서 학자들은 굴화 남쪽에 있는 삼백미터 영취산을 낭지스님이 사는 곳으로 추정하고 그 동북쪽이라는 반고사의 터를 현재의 반구대 인근으로 비정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http://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574026338267|전문 참조]]. '''결과적으로 이 반고사(磻高寺)가 반구대의 가장 첫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자가 엄연히 다르기는 하나 각기 사용되는 글자들을 살펴보면 물이 흐르는 곳이니 강이름 반(磻), 거북이가 엎어진 것처럼 보이니 거북 구(龜), 굽이굽이 돌아가니 굽다, 돌다 반(盤), 언덕도 되고 물가도 되니 고(皐) 등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의미가 통하는 한자를 가져다 쓴 듯하다.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790360|전문 참조]] 이에 따르면, 실제로 반구산 아래의 대곡천(반구천)이 빙 돌아가는 지형 한가운데(磻高)에 위치한 반고사(磻高寺)가 반구천, 반구산, 반구대 등이 가장 원래 이름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유래는 대략 [[7세기]]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셈이다. 반고사가 위치하여 반고대라고 불리던 곳이 이후에 여러 가지 이유[* 가령 발음 ㅗ와 ㅜ를 혼동했다던가, 혹은 [[고대 한국어]]의 표기과정에서 같은 발음을 뜻이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일은 여럿 있었다]로 반구대, 반구천 등으로 변했으며, 이후에 거북이의 형상을 닮았기에 반구대라고 한다던가는 해설은 이후에 덧붙여진 일종의 [[민간어원]] 즉 한자부회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반고사의 창건시기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7세기 인물인 원효대사가 젊은 시절 머물렀던 것이 가장 빠른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천전리 각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을사년([[525년]])까지는 대곡천, 즉 반구천 인근의 골짜기가 이름 없는 계곡일 뿐이었으므로 반고사가 [[525년]] 이전에 들어서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1964년]] 사연댐이 들어서기 전의 대곡천을 보면 구량리에서 대곡천을 따라 골짜기만 타고 가면 별다른 갈림길 없이 그대로 굴화까지 도달한다. 그런데 굴화와 구량리 둘 다 신라 상대에서도 극초기부터 나타나는 지명이다. 굴화는 파사왕(80~112)대에 굴아화가 병합되었다는 조에서, 구량리는 아예 삼국유사 박혁거세조에서 신라 6촌(또는 진한 6부)의 일원 돌산 고허촌을 설명할 때 구량벌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신라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주 월성]]에서 활천리로 나가는 [[35번 국도]]와 [[불국사]]쪽으로 내려가는 [[7번 국도]] 단 2가지가 있는데, 35번 국도를 따라가면 구량벌에서 언양으로, 7번 국도를 따라가면 호계를 거처 울산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언양에서 태화강을 따라 내려가면 굴화를 지나 울산에 닿는다. 다시 말해, 구량리에서 굳이 언양까지 내려가서 돌지 않고 대곡천을 따라 굴화까지 가는 길이 한 번 발견되었다면 이후에는 꽤나 인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원효대사가 머문 것은 빨라도 7세기경일테므로 딱히 모순되는 부분은 없다.[* 일부에서는 심지어 불교계의 [[http://www.tongdosa.or.kr/bbs/content.php?co_id=menu01104|홈페이지]]에서 낭지화상이 반고사에 머물렀다고 잘못 서술되었다. 근거가 앞서 첨부된 삼국유사 낭지승운조이므로 이는 앞서 원효가 반고사에 머물 때 영취산의 낭지승운에게 가르침을 청하러 갔다는 구절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낭지승운이 머문 곳은 영취산 혁목암이고, 반고사가 영취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낭지가 반고사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낭지승운이 기록에서 발견되는 가장 빠른 연대가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法興王) 14년([[527년]]) 영취산(靈鷲山)에 법장(法場)을 열었다는 조이므로 이 역시 연대상 문제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